조견과 4성제
조 견(照 見)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니다. 다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조견에 의한 현실에 대한 비춤의 결과이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스스로 나와 나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나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침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을 올바르게 관찰하였기에 나올 수 있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조견(照見) - 불교근본교설
연기법(緣起法) - 현실의 법칙
연기(緣起)는 온갖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이 모여 성립한 것이므로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것은 없고, 조건과 원인이 없어지면 그 현상도 사라진다는 진리이다. 불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라이타라는 원인[因]이 있고, 켠다는 동작[緣, 조건]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가 가능하다. 이 때 라이타를 켜는 동작을 멈추면 불은 사라진다. 연기법은 이론적으로 이 세상에 항구적인 실체(實體)가 없음을 밝히고, 실천적으로는 우리의 괴로움은 만법이 실체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있는 듯이 집착하고 분별하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원인과 조건[緣起]을 제거함으로서 현상의 세계(괴로움의 세계)에서 해탈[벗어나]하여야 한다는 불교의 기본교리이다. 공사상은 이 연기론(緣起論)에서 비롯된다.
삼법인(三法印) - 현실의 속성
일체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생(生)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멸(滅)한다는 진리는 이 세상 어떤 것도 항상 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실의 속성이며, 모든 법의 속성이다. 모든 법은 인과 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 인과 연의 화합이 다하면 반드시 어떠한 존재도 멸한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존재도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현실의 첫 번째 속성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이란 가변적(可變的) 일반현상, 온갖 존재 전체, 유위(有爲)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과 현상[만법, 萬法]은 무상이고 무아이다.
이렇게 일체 모든 법은 어떠한 것도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반드시 언젠가는 멸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유추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존재도 ‘나다’ 고 할만한 고정된 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는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여 잠시 일어난 존재일 뿐이며, 인과 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고정된 ‘나’가 아니고, 연기된 존재로서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진 나, 거짓된 나 일 뿐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두 번째 속성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제법은 존재하는 온갖 것과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망라 한다. 연기하는 세계는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다음에 올 수밖에 없는 존재의 속성은 괴로움[苦]이다.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한다.
오온(五蘊).십이처(12處) - 현실의 구조
현실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현실이란 일체(一切)라고도 하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이 세계, 이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보는 안목을 요즈음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면 우주관, 혹은 세계관이라 하겠다. 과학이란 본래 물질세계의 법칙을 알아내고 관찰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곳에 약간의 정신세계가 들어가면 과학에서는 혼동이 일어난다. 불규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세계까지 포함하여 생각한다면 전혀 혼동될 수 없는 인과 연의 지극히 규칙적인 연기로서의 진짜 과학, 참 과학이 된다. 이러한 연기로서의 규칙적인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바로 지금[시간], 이 곳[공간]에서의 나를 중심으로 일체 세계, 우주를 바라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현실이라는 것은 바로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의 교설이다. 오온이라고 하면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물질세계는 색으로 간단히 표현되는 반면에 정신세계는 오히려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수?상?행?식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십이처라고 하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인 육경(六境)으로, 육근은 인간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하고, 육경은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고 하는 육근의 감각기관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만을 일체의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있고, 의지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만을 일체제법인 현실의 세계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주관을 내세우고 있으며, 우리의 육근, 즉 나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업(業)과 윤회(輪廻) - 현실의 존재방식
우리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나쁜 짓을 하고도 그 과보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피해가길 바라고, 무상(無常)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내 육신, 내 재산, 내 명예에 집착하여 그것이 멸할 때 괴로움에 빠지게 되고, 무아(無我)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온갖 나를 위한 이기심을 키워가고 있다. 이렇게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으로 인해 우리는 ‘나다’는 생각에 갇혀 몸과 말과 뜻으로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를 짓고 살게 된다.
이렇게 신(身)?구(口)?의(意)로 세 가지 어리석은 행위를 지음으로서 우리는 그에 합당한 결과를 받게 된다. 그것은 업(業)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여 언젠가 우리에게 과보(果報)를 가져다준다. 다시 말해,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삼업(三業)은 우리의 삶을 윤회의 수레바퀴로 몰아간다. 업을 짓기에 그 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하고 과보를 받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류에 따라 여섯 갈래의 길[육도(六道)]을 언제까지고 돌고 돌게 된다.
조견의 체계 - 사성제(四聖諦)
현실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 본 결과 얻은 결론은 현실의 여실한 모습은 바로 괴로움 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셨다고 경전에 수차례에 걸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팔만 사천의 대장경이 있고 수많은 경전이 있으며 45년 여 동안 전법포교를 하셨지만, 그 많은 양의 경전과 기나긴 기간 동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것이 전부다. 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체계적인 정리가 바로 사성제(四聖諦)라 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이다. 사성제는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고성제 - 4고(苦), 8고(苦)
현실세계(사바세계)는 고통의 연속이다.
고성제란 “현실을 여실히 살펴보니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괴로움의 진리이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며 늙는 것이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과 죽는 것이 괴로움인데 이를 4고(4苦)라 한다. 또 사랑하는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미워하지만 보아야 하는 것도 괴롭고,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우며 오온이 치성하여 괴로운데 이들 모두를 8고(8苦)라 한다.
집성제 - 집착심, 분별심[번뇌, 煩惱]
현실세계가 고통의 연속인 원인은 무명, 즉 번뇌가 원인이며 번뇌는 집착하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왜 괴로운지를 알아야 그 원인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성제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조견하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다. 태어났기에 노 ? 병 ? 사(老 ? 病 ? 死)의 괴로움이 있다. 그렇다면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에서 비롯됨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을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으며,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다. 이것이 바로 십이 연기(12緣起)이다.
무명이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임을 알았지만, 무명은 말 그대로 근본이 되는 원인이기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현실에 비추어 보니 애(愛)와 취(取)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집착심과 분별심이 바로 생사윤회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사의 괴로움을 없애려면 그 원인을 없애야 하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행의 초점(焦點)은 무집착?무분별에 있다. 그래서 모든 수행의 핵심, 본바탕은 집착을 놓는 방하착(放下着)과 무분별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게 하는 모든 정신작용을 한마디로 번뇌(煩惱)라고 한다. 이 번뇌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번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괴롭히는 나뿐 정신작용의 총칭이며, 망념(妄念), 혹(惑)이라고도 한다.
멸성제 - 열반, 해탈
무명[번뇌]을 소멸시킴으로서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된 상태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라 하여 멸성제(滅聖諦)하고 한다.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 실천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 이며,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진리다.
도성제 - 중도, 팔정도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중도(中道)라고도 하며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을 의미한다.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의미한다. 따라서 팔정도는 삼학을 중도설(中途說)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한 바른 수행이 바로 정(定)이며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 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속한다.
팔정도에서 수행의 핵심은 정견(正見)과 정정(正定)이라고 할 수 있다. 정견, 정정을 말하기에 앞서 나머지 정사유[바른 사유 - 의업], 정어[바른 말 - 구업], 정업[바른 행동 - 신업], 정명[바른 생활],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관찰] 등은 종교적, 윤리적 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교 윤리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불교 윤리의 핵심이 바로 십선업(十善業)이다. 이러한 윤리 생활이 바탕이 되어 수행생활로 나아가면 팔정도의 핵심인 정념과 정정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정념(正念)이다. 이 원리에 입각해 지관겸수(止觀兼修), 정혜쌍수(定慧雙修) 등의 교학이 나올 수 있었다. 반야심경의 조견(照見) 또한 이 정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정념과 정정을 올바로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정정진이며, 이렇게 수행했을 때 나타나는 올바른 견해가 바로 정견(正見)이다. 정념이란 우리의 몸과 느낌, 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는 관찰 수행법이다. 정정이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 즉 일체경계에 집착하여 시달리지 않고 항상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실천이 바로 참선이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시냇물처럼 꾸역꾸역 흐르는 것이 마음이다. 이 마음을 한 곳에 붙잡아 놓는 것이 정정(samatha)고, 집중된 마음상태에서 법을 관찰하는 것을 정념(vipassana)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