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國師峰) 사자암(獅子菴)
국사봉(國師峰) 사자암(獅子菴)
사자암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280번지 국사봉 아래에 틀어 앉은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다.
사자암이 소재하는 동작구는 1936년 이전에는 금천현에 소속된 행정구역였다. 금천구에는 전통사찰
호압사(虎壓寺)가 있다. 호압사의 창건 유래는 두 가지기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1396년(태조6년)에 무학대사에 의하여 건립되었다는 설과
두 번째는 1407년(태종7년)에 국가에서 세웠다는 기록이다. 전자는 여러 설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후지는 봉은사지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의 설에 의하면,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하고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궁궐을 짓고 성을 쌓는 데 밤만 되면 비가 내려 축성하던
건물과 성이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였다. 기이하게 생각한 이성계가 하루는 꿈을 꾸는데, 상체는 호란이 모습을 하였으나 몸뚱이는
사람같이 생긴 산만큼 큰 동물이 뚜벅뚜벅 걸어와 궁을 부수고 성을 마구 허문다.
이를 목격한 이성계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니 땀이 온 몸으로 흠뻑 젖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문을 열어보이 훼엉청 밝은 달빛에 저 멀리
남쪽에서 호랑이가 어흥하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자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피니 조금
전 꿈속에서 나타난 호랑이가 아니가?
이 때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이로다.”
이성계는 의아해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누구냐고 물었다.
“그건 아실 것 없습니다.”하고 대꾸한 노인은
“장군께서 심려하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까 하여 여기에 왔습니다.”한다.
이성계는 무슨 묘안이 있느냐고 공손히 물었다.
노인은 이성계가 조금 전 바라 본 그 산을 가리키며 저 산의 산세를 눌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계는 그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노인은
“호랑이가 기운을 못 쓰도록 절을 세워 호랑이 앞 다리를 누르십시오.”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이성계는 다음날부터 그 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라 하였다.
금천구 금지산에 있는 호압사는 이러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한편, 조선 초기 금천현의 현감을 지낸 윤자(尹慈)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남긴 글에 의하면
금천 동쪽에 산이 있는데 산세가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호암산이라 한다. 풍수가 들이 이 상을 보고 호랑이 북쪽에 절을 지어
호압사(虎壓寺)라 하고, 그 북쪽 7리에 다리가 있는데 이를 궁교(弓嬌)라 하며, 또 북쪽 10리에 암자가 있는데 이를 사자암(獅子庵)
이라 한다.
하였다.
정리하면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성을 쌓는 데 이유 없이 자꾸 허물어져 그
까닭을 밝히니 당시 금천현에 있는 호암산[금지산]의 형세에 눌려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가
들의 의견을 따라 호암산의 지세를 누르기 위하여 호암산에 호압사를 짓고, 이 곳에서 한양 궁궐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림천에 궁교를 짓는 한편 사자암을 지었다는 전설이다.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이 있고, 궁교는 활로 호랑이를 제압하는 의미가 있으며, 사자암은
호랑이를 이길 수 있는 짐승이 사자뿐이므로 호랑이 앞에서 버티고 있으면 호랑이가 한양성으로
진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하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사자암에 있는 사자암의
건립 유래를 보면 다른 내용이다.
본 암자는 1396년 무학대사께서 창건 하셨다. 대사께서 이태조의 한양천도 계획을 지도하셨는데, 전하는 바로는 대사께서 한양의
지세를 살펴본즉 만리현(현 만리동)이 밖으로 달아나는 백호(白虎)형이므로 한양의 안정을 위하여 그 맞은편 관악산[금지산]에
호압사를 짓고 사자 형상인 이곳에 사자암을 창건하여 그 위엄으로 백호의 움직임을 막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태조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추대하고 자주 이 곳을 찾아 국사를 논하였으며, 대사를 추존하는 뜻으로 궁교산이라고 불리던 뒷산을 국사봉(國師峰)
이라 하였다.
전체적으로 그 의미가 앞서 적은 내용과 일맥상통하나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리동의 호랑이를 누르려면 만리동에 호압사를 지어야 하지 강 건너 멀리 떨어진 금천에 호압사를
지을 이유가 없으며, 또 무학대사는 왕사였지 국사가 아니며, 국사봉은 國思峰으로 세종의 형님이
이 산 아래 기거하면서 이 산에 올라 국가와 아우가 잘 되기를 기원하였다는 전설이 옳을 듯싶다.
그렇다면 사자암의 건립유래는 앞에서 소개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사찰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서울의전통사찰에서는
(사자암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창건되었다고 보는 점은 모든 설이 일치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창건 이후 사자암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자암은 거의 폐사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조대왕이 그 서문을 쓴
『범우고』의 금천조에 ‘사자암은 궁교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경준(1712~1781)이 쓴 『가람고』의
금천조에도 호압사의 이름은 보이지만 사자암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 밝히고 있다.
한편 사자암 앞에 서있는 안내문에는
1977년 10월 주지로 부임한 원명스님의 원력으로 극락보전, 큰방, 요사 2동과 칠성각이 개축되고, 종각 대문, 조실채를 신축
하였으며, 범종과 담장을 축조 전 도량을 일신하였다.
고 적고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상님을 모시고 있다.
이 그림은 극락보전 좌측 측면 상단에 있는 그림으로 '此寺由來'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마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백호에 대해 상의하는 것 같다.
용뉴가 용이 아니고 사자인 것이 특이하다.
이 사진은 동작구청에서 국사봉 오름길 옆에 세워둔 안내문이다.
고운 전 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