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금천구 시흥동 현령공덕비
서울 금천구 시흥동 현령공덕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는 수령 800여 년으로 보는 은행나무 세 그루가 서있다. 이 곳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금천현
관아의 위치를 말하고 있으며, 1794년 정조임금이 수원 능행을 하면서 경숙을 하던 시흥행궁이 있었다.
이곳 관아는 1910년 12월까지 금주현, 금천현, 시흥현, 시흥군청으로 사용되어 왔다. 1904년 제2차 시흥농민봉기
때 관아와 행궁이 불에 타는 등 일부 훼손되는 등의 사유로 시흥군청사가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이전되었다.
이곳은 1794년 이전에는 금천현감(종6품)이 근무하였고, 1795년부터는 시흥현령(정5품)으로 행정기관명의
개정과 동시에 승격시켰다. 이 때의 시흥관아와 행궁의 진출입로는 대략 현 대우당약국, 우리아카데미학원,
본치과의원 앞을 지나는 길이였다. 이 길을 따라 현감, 현령들의 치적을 기리는 비(碑)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선대인들의 진술).
시흥군청이 영등포로 이전한 이후 관리 소홀을 틈타 관아건물과 행궁건물이 손실되어 없어지고 현령.현감의
치적비는 개울에 쳐 박혔다.
1963년 이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고, 1968년 도시계획이 처음으로 수립공포 되었다. 이 것이
‘시흥지구토지구획정리사업계획’이다. 이 계획에 의하여 카멜리아 앞을 지나 시흥4거리에 이르는 개천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고, 복개되었다. 이 때 개울에서 건져 낸 비가 현재 은행나무 옆에 서있는 4기의 비석이다.
이 비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 명 | 직위 | 재직기간 | 비 문 내 요 | 건립시기 |
金 炳 怡 김 병 이 | 현령 | 1876. 1. 30 1878. 3. 23 | 縣令金侯炳怡淸德愛民善政碑 현령김후병이청덕애민선정비 | 1878년 8월 |
李 章 赫 이 장 혁 | 현령 | 1878. 3. 23 1879. 12. 21 | 현령이후장혁영세불망비 縣令李侯章赫永世不忘碑 | 1880년 4월 |
趙 容 九 조 용 구 | 현령 | 1884. 2. 20 1884. 10. 29 | 현령조후용구영세불망비 縣令趙侯容九永世不忘碑 | 1885년 2월 |
方 天 鏞 방 천 용 | 현령 | 1889. 1. 20 1892. 1. 27 | 縣令方侯天鏞永世不忘碑 현령방후천용영세불망비 | 1890년(재직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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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고운 전 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