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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사상사(思想史)

 

                  불교의 사상사(思想史)

 

                                                     

                                                                                           

 

초기불교(初期佛敎) - 근본불교(根本佛敎), 원시불교(原始佛敎), 아함불교(阿含佛敎)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 그 분의 유시에 따라 장례는 재가신자(在家信者)들이 맡았다. 재가신자들은 장례를 마치고 나서는 불교교단에서 발을 뺏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주 불교와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고 여전히 출가수행자에게 공양물을 제공하는 등 재시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가수행자들은 재가자들을 관심에서 멀리하면서 출가수행자 그들만의 불교를 만들어 갔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에 교단에는 중심적 인물이 없어 교단이 흔들리는 현상이 일었다. 이때 사실상 제일 장로인 마하갓사파(마하가섭)이 라자가하에서 출가수행자 500명을 모아 놓고 불교교단의 단합을 꾀하였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제1결집(弟1結集)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마하가섭이 회의를 주재하고, 25년간 한결같이 곁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시봉을 든 아난다(Ananda)가 평소 가까이에서 정확하게 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법, 法, dharma)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를 하나씩 암송(暗誦)하였다. 그 다음에 그것이 틀리지 않으면 500 아라한이 함께 합송(合誦)하고서 이를 확인하고 승인하면 하나의 경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밟아서 경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팔리(Upali)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르신 계율을 잘 따르고 잘 기억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그가 계율(戒律, vijaya)을 암송하고 나면 500아라한이 확인하고 승인하는 식으로 하여 교단의 계율이 성립되었다. 이 자리에서 율은 바꾸지 않는 것을칙으로 정하였다. 불교교단은 처음부터 체계 있는 계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사례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즉 불교계율은 오늘날 헌법이나 법률과 같이 일시에 제정된 것이 아니고 많은 비구와 비구니가 출가하여 승단에 참여하면서 승단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비구 자신의 수학하려는 결의를 결속시킬 필요가 있었고, 교단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계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계는 비구와 비구니 개인의 결의를 뜻하고 율은 승단 전체가 지켜야 할 단체규정이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남기신 법(法)과 율(律)을 수집하고 확인하여 경장(經臧)과 율장(律藏)이 완성 되었으며, 후에 선사님들이 경장과 율장을 해석하여 이론을 세웠는데 이를 논장(論藏)이라고 하며 경장, 율장, 논장을 삼장(三臧)이라고 한다. 장은 바구니라는 의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언행록이 경전으로 만들어진 경위는 복잡하다. 제1차 결집에서 확인된 경과 율은 곧 바로 문자화 되지 않았다. 이들이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각 부파별로 필요하여 일부 문자화 한 경우가 있었으나 나름대로 통일된 문자화 경전을 갖추게 된 것은 기원전 94~80년대 제4차 결집을 통하여 빠알리(pali)어로 된 빠알리 경전이 완성된 시기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서민들의 언어인 빠알리어로 설법을 하였는데 이것을 빠알리 경전이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역사에서 가장 큰 후원자였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무너지고 뿌샤미뜨라(기원전 187~151)가 슝가왕조를 세웠다. 그는 브라흐만 출신 이였다. 이때부터 브라흐만(사제계급)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상류 언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이때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산스크리트어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은 설일체유부의 영향을 받아 서북인도(간다라)와 중국,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동에 전파되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경전이 아함경전이다.

 

빠알리경전(Pali sutta pitaka)은 ① 디가 니까야(긴 길이의 경전), ② 맛지마 니까야(중간 길이의 경전), ③ 쌍윳띠 니까야(주제별로 모은 경전), ④ 앙굿따라 니까야(부수별로 묶은 경전), ⑤ 쿳다까 니까야(15개의 독립된 경전으로 구성) 등 다섯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분야별 경전이 한자로 번역된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4세기 말, 5세기 초이다.

 

디가 니까야는 장아함경으로, 맛지마 니까야는 중아함경, 쌍윳띠 니까야는 잡아함경으로, 앙굿따라 니까야는 증일아함경으로 각각 번역되었다. 그러나 쿳다까 니까야는 법구경과 같이 여러 단일 경전으로 각각 번역되었다.

 

아함경은 출가수행자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와 재가 수행자를 아울러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그에 맞는 법을 설하셨는데도 아함경의 내용 중 80내지 90% 이상이 출가수행자를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 불교시기에 재가 신자는 교단을 떠나고 출가자만이 남아서 경을 편집하였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를 달리 원시불교, 근본불교, 아함불교라고 하는데 그 시기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때부터 입멸(入滅) 후 100년(혹은 110년)경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파가 발생하기 이전을 이른다. 이 시기는 제1결집에 의하여 정리되고 발전된 아함경이 중심이 되던 시기이다. 아함경은 출가 교단에 의하여 편집되고 전승되었기 때문에 재가신자에 대한 교설은 대부분 산실된 흠이 있으나, 불교 경전의 원전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초기불교에는 연기(緣起), 무아(無我), 고(苦), 무상(無常),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등 석가모니부처님의 본래적 사상과 실천이 잘 보존되어 왔다.

 

부파불교(部派佛敎) ․ 아비달마불교. - 승단의 분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00년(혹은 110년)이 되는 해에 베살리에서 제2결집(弟2結集)이 있었다. 제1차 결집 때 계율은 바꾸지 않는 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을 존중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승단이 있는가 하면, 계율을 현실성 있게 변화시켜 적용하는 승단이 있었다.

코삼비국 출신 장로인 야사(Yasa)가 있었다. 그는 자이나교도와 바라문교도들이 많이 사는 중서부 인도 지방의 아반티, 데칸 등지에서 교화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한 야사 장로가 베살리를 방문하였는데, 베살리 거리에서 비구장로들이 신자들에게 금과 은을 보시하라고 권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보시가 실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계율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금・은 보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야사는 깜짝 놀랐다. 그 외에도 베살리에서는 ① 싱거운 음식을 간하기 위하여 소금을 지니고 다녀도 된다. ② 정오 후에 음식을 먹어도 된다. ③ 공양 후에 신자가 초청하면 마을에 들어가도 된다. ④ 같은 지역에서 거주하는 비구들이 각각 포살예식을 하여도 된다. ⑤ 구성원들이 공식적인 일에 불참하여도 후에 불참자의 동의를 구하면 된다. ⑥ 스승이 행하였다면 어떤 것을 해도 된다. ⑦ 공양한 후에도 버터가 되기 전의 우유를 마셔도 된다. ⑧ 발효되지 않은 야자술을 마셔도 된다. ⑨ 테두리가 없는 정해진 크기가 아닌 앉을 깔개를 사용해도 된다. 등 당시 계율에서 금기하는 10가지가 베살리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야사는 이러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방의 상좌들을 베살리 바리까 승원에 집결시켰다. 서방장로들과 베살리 장로 등 700아라한이 모였다. 이 때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100년(혹은 110년)이 지나서이다. 인도 서방의 쏘레야에서 수도하던 정통파 좌장 레와따 장로가 의장이 되고, 베살리의 원로 장로인 삽바까민(당시 120세)이 의장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0가지 계율 하나하나의 옳고 그름을 질문한 결과 삽바까민은 모두가 잘못된 계율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 결집(제2차 결집)에서 베살리의 밧지족 비구들이 변경하여 적용하는 계율은 부당하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밧지족 비구들은 그 결과에 불복하였다. 그래서 어떠한 계율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장로를 중심으로 한 정통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theravada)라고 부르게 되었고, 어떤 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는 일반 비구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집단을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교단은 분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근본분열(根本分列)이라고 불교사에서는 부른다. 그 후 상좌부는 상좌부대로, 대중부는 대중부대로 자체분열을 계속하여 결국 상좌부가 11개 부파로, 대중부는 9개 부파로 분열하여 20개의 부파가 생겨났다. 분열하게 된 이유는 비단 세력 다툼만은 아니다. 문자화 하지 못한 경전이 구전(口傳)되면서 변화를 가져왔을 수도 있고, 같은 달마와 율이라 하여도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변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유력한 지도자의 영향력이나 지리적 여건도 다른 달마와 율을 만들어 내는 환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각 부파마다 서로 다른 경장과 율장으로 승단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를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후대에 와서 부파별로 교리연구에 중점을 두고 논리를 발전시켜 나간 것을 아비달마(abhidharma)불교라고 한다.

 

부파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독특한 설법인 대기설법(對機說法), 응병여약(応病與藥)에 의하여 즉흥적,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다. 아함경은 내용이 중복되고, 같은 내용이지만 표현방식을 달리한 경우 등 체계적이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초기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교설속의 어구(語句)에 대한 주석적 설명이 필요했고, 여러 교설을 정리하고 재배열하여 조직할 필요가 절실했다. 교설에 대한 주석과 체계적인 정비를 통하여 점차 아비달마적 경향이 발달하여 마침내 경에서 독립된 아비달마론서[論藏]인 「아비달마발지론」, 「아비달마구사론」, 「청정도론」 등 불후의 논서들이 출현하였으며, 바수만두(세친), 붓다고사(불음) 등 논사(論師)가 나타나 불교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결과적으로 삼장 중에서 논장을 아비달마라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는 제2결집이 있은 시기부터 BC1세기경까지 35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

 

부파불교가 곧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대승불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이다. 부파불교, 아비달마 불교가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승단을 운영하면서 출가자를 위한 교리만을 주장하였으며, 불타가 아닌 아라한이 수행의 최종목적 이였다. 이들은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라한의 범위에 두고, 그 분을 인간으로 인정하여 입멸한 것으로 봄으로서 불교승단은 다만 그분의 가르침인 다르마와 율을 지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수행의 전부였다.

 

소승불교의 경전은 초기에 구전되어 오다가 부파별로 관리하여서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소승경전은 빠알리(pali)어로 통일된 상태로 보전되어 왔다. 빠알리어 경전은 기원전 94~80년경에 스리랑카 마딸레 지방의 알루워하라 승원에서 500명의 장로가 모여 경장, 율장, 논장의 전체 3장을 체계적으로 문서화 하여 집대성 하였다. 이를 불교사의 제4차 결집이라고도 한다. 이 경이 후에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한자로 번역된 것이 아함경임을 앞에서 알아본 내용이다. 소승불교의 경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하여서 소박하고 알기 쉽게 되어 있으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상대방의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 등을 참고하여 그에 알맞도록 같은 내용이라 하여도 다른 말로 표현 하다보니 중복된 부분과 체계가 바로서지 않은 부분이 다수 있다. 소승경전은 용수(150~250년경 사람으로 중관학을 발전시켰다)의 저술 속에 나타나는 경전을 초기경전이라 하고, 그 외의 것을 후기 경전이라고 한다.

 

기원을 전후하여 대승불교가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소승불교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둘은 공존하였다. 소승불교의 주된 활동지역은 동인도 이였으며, 차츰 스리랑카, 태국, 버마 등 동남아로 전파되어 현재 이를 남방불교라고 부른다. 대승불교는 서북인도 지역에서 발전하다가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등지로 전파되어 이를 북방불교라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왕성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쇼카왕(기원전 268년에 즉위)의 영향이 크다. 그는 불교정화와 전파에 큰일을 하였다. 아쇼카왕 17년경에는 이교도(異敎徒)들이 불교를 등에 업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 정식 비구인양 행세 하면서 불교승단을 교란시켰다. 이를 알게 된 아쇼카왕은 가짜비구 6만 명을 색출하여 불교교단에서 추방하여 승단을 깨끗하게 정화 하였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제3차 결집이라고 한다. 이후 아쇼카왕은 북으로 간다라, 캐시미르, 서부펀잡 지역, 그리스인의 세계, 히말라야 설산지역, 황금의 땅 미르마, 스리랑카 등지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강력한 불교전파 정책을 펼쳤다. 그 영향으로 불교가 서부지역과 로마 등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아쇼카왕은 세자시절에 당시 서북인도(현재의 파키스탄)인 간다라 지역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근무한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왕이 된 후에 그곳에 많은 불탑과 정사(절)를 세우고 포교사절단을 파견하여 그곳에 불교를 확실하게 심었다.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이 잠시 정복하였던 이유로 인도문화와 헬레니즘문화(그리스)가 혼합된 간다라문화를 세웠으며, 비교적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스런 창작문화를 형성하였다. 또 아쇼카왕은 당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열개나라의 왕들이 사리를 모셔다 10개의 불탑을 세웠던 것을 해체하여 8만 4천개로 사리를 나누어 8만 4천개의 불탑을 세웠다. 불탑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신자가 관리를 맡았다. 아쇼카 왕은 탑을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에 충당하기 위하여 많은 토지를 기증하였다. 그들은 불탑벽면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중 중요한 사건이나, 설법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 넣는 등의 방법으로 불탑을 찾는 많은 참배객에게 석가모니부처님을 알리고 그 분의 가르침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재가신자들의 꾸준하고 신선한 노력이 점점 확산되었으며, 당시 인도 대중들은 깨달음 자체에 목적을 두고 깨달은 후 회향(回向)에는 관심이 부족한 아라한 중심의 부파불교보다는 탑 중심의 대중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숲속에서 명상수행에만 정진하던 숲명상가들이 이 새로운 기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숲명사가들은 석가모니부처님 재세기에도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허락을 받아 숲 속에서 홀로 명상수행을 하는 자가 많았을 것으로 본다.

 

석가모니부처니의 여섯 번째 제자인 베나레스의 장자 아들 야사가 있다. 야사의 친구 네 명이 야사에 이어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중에 우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숲(아란야)에서 명상수행을 하였다.

이발사 출신의 우발리가 석가모니부처님에게 숲 속에서 명상을 하겠다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러한 비유를 들면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코끼리가 연못에서 기분 좋게 목욕을 하고, 귓속까지 깨끗하게 씻었다. 이를 보고 있던 토끼가 코끼리가 떠난 다음에 자기도 목욕을 하려고 연못에 뛰어 들었다. 그런데 연못이 깊어서 수영을 못하는 토끼는 익사하고 말았다.」 아마도 우발리는 이발사 출신인데다 숲속명상에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다하셨던 듯 하다.

 

또 한편에서는 숲속명상가 중에는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적 사상과 승단에 대한 불만이 있어 불단을 떠나서 숲속으로 들어간 수행자도 있었을 것이다. 재가신자와 숲속명상가가 뜻을 같이하여 불교를 일대 혁신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만 있고 불타는 없다. 아라한은 자리(自利)적이다. 그들은 아라한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대중을 위한 마음이 부족하다. 그러나 불탑을 중심으로 대중 속에 전파된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이 때 숲명상수행자들이 합세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불교를 보게 되었다.

 

이들은 불타를 내세운 것이다. 깨달은 후에 열반에 들기를 원했던 아라한의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니라 범천(梵天)의 권청을 받아들여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利他] 불타를 보게 되었다.

서북인도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담(前生談)을 만들어 이제까지 단순한 아라한 이였던 석가모니부처님을 시아본사, 사생자부이신 석가모니부처님으로 격상시켜 나갔다. 영생(永生)의 존재로 신격화 된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은 보살(菩薩, bodhisattva)로 태어나게 되었다.

 

불교를 일명 숲의 종교라고도 한다. 이러한 명상파(yoga師)는 정신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과 법담(法談)을 나누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이 현현(顯現)하여 설법을 하고 부처님을 배알하는 명상체험(瞑想體驗)을 가질 수 있었다. 숲 속 수행자들이 명상체험을 통하여 현현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기리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인 석가모니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도서부의 마투라와 서북인도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불상을 만들어 모시기 시작하였다. 이 때를 기원 전후로 보고 있다.

한편, 앞에서 논한 아비달마적 사고는 대승불교 발생의 맹아(萌芽)가 되었다. 즉 대승불교는 아비달마의 사고 속에서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초기경전의 해석과 체계적 정리를 통하여 논장(論藏)이 성립되고 나서 경전을 달리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한 내용 중 공통사항을 뽑아서 한 곳으로 모아 단일경전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기경전에 있는 공사상만을 발취하여 주석을 달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대승불교의 최초경전인「반야경」이다. 반야경은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기원후 1세기 경에 남인도에서 탄생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서북인도에서도 만들어 졌다. 이렇게 각지에서 만들어진 반야경전은 무려 640편이나 된다. 반야경을 집대성 한 곳은 서북인도로 본다. 이곳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세력이 강한 곳 이였기에 초기 반야경은 이들과 대립이 심했다고 한다.

 

반야경의 종류는 ⅰ대품반야경(총28권, 또는 30권, 40권, 마하반야바라밀경), ⅱ 소품반야경(총10권, 마하반야바라밀경), ⅲ 대반야경(총600권, 대반야바라밀경), ⅳ 반야심경(1권, 반야바라밀다심경), ⅴ 금강경(1권,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있다.

반야경은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인 공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인도에서 반야경을 시작으로 화엄경, 법화경, 해심밀경, 여래장경 등 대승불교 경전이 만들어 졌고, 새로 만들어진 경전에 정통성을 인정하여 정식 불경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주 경전을 소의(所衣)로 하여 여러 종(宗)이 생겨났다. 인도에서 파(派)라고 하였다면, 중국으로 와서는 종으로 불리어져 인도의 부파불교는 중국에서 대승이 종으로 갈라진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반야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공사상(空思想)과 중관사상(中觀思想), 해심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유식사상(唯識思想), 여래장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만들었고, 중국으로 와서는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과 무량수경・아미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정토종(淨土宗)을 비롯하여 선종(禪宗)이 성행하였고, 티베트에서는 밀교(密敎)가 크게 일어났다.

 

불교사를 시대구분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ⅰ석가모니부처님의 재세시대, ⅱ 초기불교, ⅲ 부파불교, ⅳ 아비달마불교, Ⅴ 대승불교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며, 아비달마불교는 소승과 대승의 중간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가 일어났다고 하여 소승불교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병존하여 왔다. 지금도 남방불교는 소승이며, 북방불교는 대승이다. 대승이 일어난 기원 전후를 불교의 대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 사상사(思想史)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은 공사상(空思想)이다. 중관사상이 되었든, 유식사상이 되었든 불문하고 공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설명하는 수단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할 것이다. 공사상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1세기 무렵으로 본다. 발생한 장소는 남인도이며, 남인도에서「반야경(般若經)」이 저술되어 서북인도로 확장되었으며, 이곳에서 집대성 되었다. 반야경은 경전군(經典群)의 이름이지 단일경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반야경이 최초의 대승경전이며, 대승불교는 이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사상이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반야 중 비교적 초기에 집성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다.

 

공사상(空思想)

인간은 유한(有限)한 생명으로 인하여 불안,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늙고, 병드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중생들을 이러한 고통의 세계에서 구제할 수 있을까를 놓고 6년 동안 고민하였다. 그 결과 네란자라 강가에서 여명을 맞이하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것이 연기(緣起)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一切法, 萬法]은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존재라는 우주진리를 깨달으신 것이다.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이 있으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므로 항상 함이 없다는 원리가 공사상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인연 따라 생(生)・주(住)・괴(塊)・멸(滅)하는 존재에 대하여 일체법이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집착(執着)하거나 분별(分別)심을 가져 중생이 괴롭다고 하셨다. 중생은 우주의 진리, 만고불변의 진리인 인연의 법칙을 모르므로[무명, 無明] 고통 속에서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법이 인연생멸(因緣生滅)하므로 공이다. 그래서 공(空)하므로 가유(假有)인 일체법에 집착하지 말고,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누누이 당부하셨다.

 

중관사상(中觀思想)

든 존재와 현상이 공이라면 수행은 어떻게 결과를 가져오고, 깨달음은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등 당시 다른 종교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도 회의론자(懷疑論者-의심을 품고, 부정하는 사람)가 많이 발생하였다.

 

중생이 공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고 있다면 중생과 보살, 깨달은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모두가 공인데 중생은 누구이며, 보살은 무엇이고, 깨닫는 다는 사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용수(150~250)보살은 8불(8不)을 제시하였다. 8불은 만법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二), 불래불출(不來不出)한다는 진리를 말한다.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절되는 것도 아니며, 같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오지도 않고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만법은 무변중심(無邊中心)에 존재한다는 이치다.

 

중관에서는 연기에 의한 것은 공임과 동시에 가유(假有, 가짜로 그렇게 인식될 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이다. 공이므로 비유(非有)이며 가유이므로 비무(非無)이다. 그러므로 공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논리가 성립된다.

 

유식사상(唯識思想)

공사상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중관사상이다. 그러나 중관사상도 오히려 논리를 모호하게 할뿐 명쾌한 이해를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일체는 공이니 허무하다’는 허무주의가 일어나는 등 악취공견(惡取空見)으로 흐르는 문제가 제기 되었으며, 또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등장한 것이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유식사상은 인도에서 Upanisad 시대부터 존재하던 요가(Yoga) 수행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초기경전에서는 항상 현실의 인간 자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속제(俗諦)를 중심과제로 다루는 유식사상이 현실성 있는 불교이론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간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등 다섯 개의 감각기관[根]으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 등 다섯 가지 대상[境]을 받아들이고[前5識], 감각기관에 포착된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제6식, 識]을 통하여 사물을 판단하게 된다. 이때 제6식은 제8식 아뢰야(alaya)식에 저장된 종자를 활용하여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제7식 말라식[manas]은 자아의식을 발동하여 아만(我慢)․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를 일으켜 번뇌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를 4번뇌라 한다.

 

제8식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때부터[無始] 우리의 생각과 행동[業]이 하나도 빠짐없이 저장되어 잠재의식으로 존재하다가 근이 경을 인식할 때 의식으로 전환 된다. 우리가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감촉을 느끼는 것은 제8식에 저장된 종자의 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물건이나 현상을 가지고 사람마다 느끼고, 반응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길에 떨어진 돈을 보고 어떤 사람은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누가 볼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몰래 주머니에 넣기도 한다.

 

깨달음이란 이 제8식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나뿐 종자[惡種子]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좋은 종자[善種子]를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유식사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은 오르지 제8식(아뢰야식)에 있는 식의 표상(表象)일 뿐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즉 ‘만법은 오르지 식의 표상일 뿐 달리 그 형체를 가지지 아니한다’는 이 아뢰야식이 우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마음이다.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여래장이란 우리들 범부(凡夫, 衆生)의 마음속에 부처가 될 씨가 들어 있어서 누구나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사상이다.

여래는 깨달음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들 중생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에 오신 분을 말하니, 곧 부처님을 뜻한다. 장(藏)은 본래 ‘저장하다’, ‘감추다’는 뜻에서 비롯되어 ‘바구니’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태 집’, ‘태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란 ‘부처의 씨’, ‘불성’을 뜻한다.

 

한 사람의 마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주를 품을 수도 있을 정도로 넓은가 하면 바늘 한 끝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기도 하다. 한 마음 속에 사랑도 미움도 품고, 좋고 나쁨도 함께하며, 자비심과 적개심도 같이한다. 마음에는 미혹의 마음도 있을 수 있고, 깨달음의 마음도 있을 수 있다. 미혹(迷惑)한 마음은 범부(凡夫)․중생(衆生)의 마음이요, 깨달음의 마음은 부처님․여래의 마음이다. 중생에서 여래를 향하여 정진수행 중에 있는 사람을 보살(菩薩)이라 한다. 여래장이란 모든 중생의 마음에는 여래가 될 수 있는 「씨」, 「태아」를 간직하고 있으니, 자기 노력에 의하여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은 무명(無明, 煩惱 - 집착심과 분별심)에 의하여 깨달음의 씨인 여래가 때로 가리어져 보이지 않은 뿐이다. 마치 태양이 구름에 가려서 볼 수 없는 경우와 같다. 태양은 영원불변이고, 구름은 수시로 변하듯이 여래의 씨, 불성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나 마음은 구름과 같이 오락가락 수시로 변하며 번뇌에 쌓여 심란하다.

 

공사상에서는 일체가 무라고 하였으나, 유식사상에서는 아뢰야식이 찰라생멸을 하면서 존재한다고 하였듯이 불성은 영원불변이다. 유식사상에서는 아뢰야식 속에는 청정식(淸淨識)과 오염식(汚染識)이 함께 존재하는 정오혼합식(淨汚混合識)이라고 한다. 의타기자성, 즉 아뢰야식 속에는 변계소집성(오염식)과 원성실성(淸淨識)이 같이 존재하는데, 정진수행을 통하여 변계소집성을 여의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다. 여래장사상은 유식사상을 좀더 현실성 있게 발전시킨 사상이라 할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어느 누구나 마음속에 생멸문(生滅門, 중생심 - 번뇌에 찬 마음)과 진여문(眞如門, 번뇌를 여읜 청정한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고 일심이문(一心二門)을 내세웠다.

 

대승불교사상중에서 공・중관・유식・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 성행하였고, 중국에서는 달랐다. 후한시대에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특정한 경전이나 논서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파적 성격을 띤 종파(宗派)가 성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선종(禪宗)이 있다. 중국불교는 절대・보편의 진리를 성(性), 리(理), 총(總), 체(體) 등으로 표현하며, 현상세계를 상(相), 사(事), 용(用), 별(別) 등으로 표현한다. 본질[性]과 현상[相], 특수[事]와 보편[理], 부분[別]과 전체[總], 생사와 열반, 중생과 보리는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닌 원융(圓融)관계이다. 이러한 사상은 태극이 음과 양으로 상극(相剋)인 듯하지만 상즉(相卽)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취지라 하겠다.

 

 

                                          고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