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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질투

 

 

                                                                                여자의 질투

 

 

 

고대사회에서도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처를 두는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었다.

 

부여국에서는 부인이 질투하면 죽이기까지 하였다. 질투하다 처형된 부인의 시신은 버려졌는데 만약 여자의 본가에서 시신을 데려가 장례를 치르려면 소나 말을 내 놓아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질투한 여인을 죽이기까지는 아니한 듯하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송양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죽었다. 그 후 화희와 치희를 얻었는데 치희는 漢人한인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질투가 심하여 서로 싸움이 잦아 왕은 동서에 각각 집을 짓고 살도록 하였다. 왕이 사냥간 사이에 두 여자가 심하게 질투싸움을 하는데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漢家한가의 婢妾비첩(종이 첩으로 된 여자)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심하냐?”

하니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갔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수심에 젖어 나무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데 꾀꼬리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느끼어 노래하기를

 

오락가락 꾀꼬리는

암수서로 의지하는 데

고독한 이내마음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하였다. 만약 고구려에도 부여국과 같은 풍습이 있었다면 치희는 마땅히 죽어야 했다. 그러나 왕은 오히려 그녀를 놓아주고 신세타령이나 한다. 요즘의 정서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신라의 국기를 바로 세워 삼한통합의 기틀을 세우는데 공이 컸다. 그 화랑의 시초는 삼산공의 딸 俊貞준정이 源花원화가 되는 데서 시작하였다. 원화를 따르는 무리가 매우 많았다.

 

한편, 법흥왕은 딸 남모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법흥왕이 국공으로 잠시 백제에 머무르는 동안 백제의 보실공주와 사통하여 얻은 딸이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뛰어났었다. 지소태후가 준정을 몰아내고 남모를 원화로 삼으려고 하자 준정이 투기를 하여 남모에게 술을 먹인 후 유혹하여 물에 빠트려 죽였다. 이 사실을 남모의 낭도들이 알려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소태후는 원화제도를 폐지하고 仙花선화를 화랑으로 삼고 그의 무리를 風月풍월이라 하였으며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고 하였다.

 

 

 

                        아우가 형수를 데리고 산다

 

예맥족은 같은 성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신라에서는 동성뿐만이 아니라 조카, 이종․고종 자매간에도 결혼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왕실에서는 사실상 형제간에도 혼인을 하는 근친혼이 성했다. 이러한 관습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이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대사회에서부터의 관습 이였다고 보아야 한다.

 

부여국과 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데리고 살았다. 아우가 형수를 취하는 것은 성적 관계로만 보아서는 아니 되고, 춥고 험한 만주벌판에서 여자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던 고대사회에서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가족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러한 풍습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제9대왕 고국천왕이 돌아갔다. 왕후 우씨는 왕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의 집을 찾아갔다.

 

“왕이 후사가 없으니 마땅히 그대(왕의 아우 발기)가 왕위를 이어야 하오.”

 

하고 말하니 발기는 왕이 돌아간 줄을 모르고 대답하기를

“하늘의 운수는 돌아갈 곳이 있으니 경솔히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부인으로서 밤에 나다니니 어찌 예의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굴러온 복을 발로 차는 순간 이였다. 아마 발기는 유학에 밝은 사람 이였나 보다. 무안을 당한 왕후는 발기의 집에서 나와, 둘째 아우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눈치가 빠르고 다소 끼가 있는 사람 이였나 보다.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문에서 맞이하여 자리에 모시고 술을 대접하였다.

 

왕후는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시고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어른이 되어 당연히 후사를 이어야 하나 나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포만․무례하므로 시숙을 보러온 것이오.”

하였다. 굴러온 호박을 넝쿨까지 가질 기회가 되었으니 연우는 손수 칼을 잡고 고기를 잘랐다. 왕의 자리와 아리따운 형수까지 얻게 된 연우는 흥분하여 칼로 손가락을 베었다.

 

이를 눈치 챈 왕후는 흐뭇한 마음으로 허리띠를 풀어 상처 난 손가락을 싸주었다.

왕후가 돌아가려 하면서 연우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어 불행한 일이 있을까 우려되니 그대는 나를 궁중까지 바래다주시오.”

한다. 연우가 따르니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거짓으로 선왕의 명이라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이다.

 

발기는 늦게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포위하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것이 예의인데 너는 차서를 넘어서 찬탈하였으니 큰 죄이다.”

하고 궁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세에 밀려 요동태수에게 망명하여 몸을 의탁하였다. 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동천왕(고구려 제11대) 8년 9월에 태후 우씨가 돌아갔다. 임종할 때 유언하기를

“내가 행실을 잃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의 고국천왕을 보겠느냐? 만약 여러 신하가 나를 구덩이에 버리려하지 아니하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의 유언대로 장사 지냈다.

 

산상왕의 능은 고국천왕릉 옆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우씨의 능이 고국천왕의 능 옆에 놓이게 되었다.

 

후에 무당이 말하기를

“고국천왕이 강림하시어 나에게 말하기를 ‘어제 우씨가 천상에 온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싸움을 하였는데 물러와 생각하니 낮이 부끄러워 차마 나라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너는 조정에 알려서 물건으로 나를 가려주게 하라.’하였습니다.”

한다. 그래서 능 사이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이로 인하여 능 주변에 소나무를 심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소나무를 무덤주위에 심는 것은 우선, 소나무는 늘 푸른 나무로 절개를 상징하는 뜻이 있고, 두 번째는 바람을 막아 묘를 보호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풍수는 바람과 물을 관리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니, 풍수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