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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三國)의 각축장(角逐場), 아차산성(阿且山城)


              삼국(三國)의 각축장(角逐場), 아차산성(阿且山城)

 

                         소재지  서울 광진구

                       지  정 사적 제234

 

우리민족이 만주에서 성읍국가를 형성하여 성장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무리가 크게 둘이

있다. 하나는 예족(濊族)이고, 다른 하나는 맥족(貊族)인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예맥족(濊貊族)이라고 한다.

 

예족은 동북만주지역에서 성장하여 부여국을 형성하였고, 맥족은 대흥안령산, 요하를

넘어와 서북방면에서 조선[고조선]을 형성하였다. 조선이 중국 한에 해 멸망하자

부여가 세력을 서남방향으로 확장하였다. 이 세력이 고구려이. 고구려에서 다시

분파하여 남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백제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夫餘)라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두 나라는 모두 동명성왕을 국조로

섬기며 때를 맞추어 정성스럽게 제사를 올렸다.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백제는 백제대로

각각 사당을 모시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며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고구려는 자기들이 종주국인데 백제가 종주국 대우를 하지 않는다고 불만이 컸으며.

백제는 그들 나름대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고구려와 힘을 겨루었다.

 

고구려와 백제사이에는 대방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286년에 고구려가 대방을 치려하니

대방이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백제 입장에서는 사돈지간인 지라 외면할 수 없어

이를 들어 주었다. 그랬더니 고구려가 섭섭하다고 불평을 한다. 백제 계책왕은 고구려가

침공하면 어찌하나 염려스러워 북방을 든든히 하기 위하여 쌓아둔 아차산성(阿且山城)

서둘러 수리하고 대비하였다(삼국사기 백제 본기 계책왕조).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 이 때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은 예성강. 개성 부근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고구려 고국원왕은 군사를

내어 막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고국원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이고, 장수왕의 할아버지 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양으로 백제를 공격한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침범하여 10성을 빼앗고 난공불락의 관미성을 함락시킨다. 뒤이어 아차산성을

함락하고 백제의 한성을 공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는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4759월에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왕도 한성을 함락시킨다. 장수왕은 아차산성을 먼저 점령한 후 이곳을 본부로 삼고

백제 한성을 공략하였다. 장수왕은 먼저 북성인 풍납토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성인 몽촌토성을 포위하였다.

 

전세가 절대 불리함을 알아차린 백제의 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신라에 보내어 원조를

청하였다(백제 본기에는 구원기사가 없다). 문주가 신라에서 군사 1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도중에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웅진(현재 공)로 들어갔다.

 

개로왕은 기병을 대동하고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고구려의 추격 병에 사로 잡혔다.

장수왕은 개로왕을 아차산성 아래에서 처형하였다. 장수왕은 지금의 평택지역까지

쳐 내려갔다 철군하였다. 이후 551년까지 76년간 이 지역을 지배한다.

 

551년에 고구려가 북방의 돌궐과 정신없이 싸우는 사이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백제는 한강하류의 한성을 중심으로 한 6개 군을 탈환하고, 신라는 죽령 등 10개 군을

점령한다.

 

553년 신라는 120년간 유지해온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일방적으로 깨고 백제가 탈환한

한성지역을 침략하여 탈취하고 여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555에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었으며, 554년에 백제 성왕은 관산성

(지금의 옥천지방)을 침공하였으나 신라의 복병에 걸려 생포되어 처형된.

 

고구려에서는 온달장군이 나서 590년에 신라가 강탈한 한강이북 고토를 수복하고자

출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차산성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온달 장군의 사망 장소는 단양 온달산성이라는 설도 있음)

 

고구려 영양왕은 603년에 장수 고승을 보내어 신라가 점령한 북한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한다.

 

아차산성은 삼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격전지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사활을

건 자존심과 신라의 영토 확장 야욕이 충돌한 장이였다.

 

이 곳 아차산성은 백제가 처음 축성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475년 이전에는 백제가

주인 이였으나, 475년부터 553년까지 78년간은 고구려가 주인 이였고, 이후에는 신라가

차지하였다.

 

아차산성을 하나로 이루어진 산성이 아니고 여러 개의 보루(堡壘)를 거느린

성군(山城群)으로 이루어 졌다. 아차산성을 중심으로 19개의 보루를 거느리있다.

보루는 전망이 좋은 산봉우리에 두었으며, 요즘 기준하여 보면 작은 보루는 분대병력이

주둔하고 큰 보루는 중대병력이 주둔하였다. 보루는 전진기지, .통신 기능을

하였다. 보루 간에는 말이 이동할 수 있는 교통로가 있다.

 

보루 19개소는 자영보루와 구의보루가 각각 1개소, 홍견봉보루 2개소, 아차산 보루

5개소, 용마산 보루 7개소, 망은산 보루 3개소이다. 보루는 북에서 수락산, 불암산을

거쳐 용마산, 아차산으로 들어와 한성으로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아주 유용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유적 조사과정에서 밝혀진 바로는 작은 보루에서 9명의 병사가 작은 석성 에서

함께 생활하며 주둔 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들은 활과 각각 30발의 살을 지니고

있었으며, 근접 전투에서는 창을 할용 하도록 각자 창 한 자루씩을 소지하고 있었다.

 

규모가 큰 것으로 밝혀진 아차산 제4보루는 100여 명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갖추고

있었다. 둘레가 249m로 석성을 쌓은 작은 성이였으며, 그 안에 건물, 온돌, 배수로

등과 투구, , , 도끼, 말갖춤 등 무기류, , 쇠스랑 같은 기구도 발굴되었다.

농기구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병사들은 식량을 어느 정도 자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온돌은 우리민족 고유의 난방시설로서 옥저에서 시작하여 고구려로 전해졌고, 이어서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으며, 현재는 보일러로 그 기능을 계승하고 있다.

 

현재(2016) 광진구에서 아차산성을 발굴 작업 중이다.

 

           <아차산성의 현항>

    성곽명칭

    지 정

    형 식

 둘레길이

  해발고도

    아차산성

 적 제234

    포곡식

  1,038m

   203.4m

 

면     적

   평면형태

     축성재료

    소재지

         63,810평방미터

 부정 6각형

석    재

  서울 광진구

 

 

            <복원된 아차산성의 모습>


     


 

 

            <아차산성과 주변의 보루>






                                              <아차산성과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



            <보루의 모습>


                                           규모가 가장 큰 아차산 제4보루


            <그외  여러 가지>


                                                 고구려 정자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아차산성 입구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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