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 망해암(望海庵)
전통사찰 제78호
경기도 안양시 임곡로 245
망해암은 관악산이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자리 잡은 비봉산 자락에 있다. 이곳은 인천 송도가
보이는 곳이라 절 이름을 망해암이라 하였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므로 관음보살을 모셨으나
지금은 관음전이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가까이에 있는 삼성산 삼막사도 인천 송도가 보이는
지라 육관음전이 주전(主殿)이며, 최근에 천불전을 별도로 모셨다.
망해암은 안양시 비산1동 대림대학교 앞으로 나있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 된 임곡로를 따라
계속 오르면 거의 끝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사찰은 도시 속에 있으면서도 경내에 들어
서면 전혀 도시 냄새가 나지 않는 포근한 느낌이 편안하다.
망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소속사이다. 「봉은사말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5년(655)에 원효(元曉)대사께서 창건하시고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사찰이
름을 망월암이라 하였다고 하며,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伽藍考」, 「여지도서」
등 역사서에서 그 이름이 확인 된다.
조선 태종7년(140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건하였고, 순조3년(1803) 정조대왕의 어머니이신
홍대비(洪大妃, 혜경궁 홍씨)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철종14년(1863)년 대련화상(大蓮和尙)
께서 중창하였다.
1922년 화재로 전소된 뒤 4년 동안 중건되지 못하다가 1926년 주지 호남(湖南)스님께서 법당과
요사 채를 신축하였고, 1939년 주지 청봉(靑峯)스님께서 용화전(龍華殿)과 삼성각(三聖閣)을
중건하고, 큰방을 중수하였으며, 1952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청봉스님께서 다시 중건하였다.
1973년 보경스님께서 용화전 앞 대방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고, 2013년에는 현 주지스님이신
성운스님께서 관음전 자리에 2층 건물을 신축하고 2층에는 천불전(千佛殿)을, 1층에는 지장전을
모셨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천불전, 용화전, 지장전, 삼성각, 종각, 5층석탑, 사적비 1기, 요사채 등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조선 세종 때 삼남(三南)에서 한양으로 조세를 운반하던 세곡선이 인천 월미도
부근을 지날 때 심한 풍랑으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선원들이 당황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홀연히 뱃머리에 한 스님이 나타나 선원들을 진정
시키고, 이 배를 무사히 인도하여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선원이 스님께서 살고
있는 절이 어디인가를 묻자 비봉산 망해암에 있다고 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망해암을 찾았으나, 그 스님은 게시지 않고 용모
가 아주 흡사한 부처님이 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공양미 한 섬씩을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망해암의 중심인 용화전에는 조선 성종10년(1479)에 조성된 높이 3m의 화강석으로 만든
미륵존불이 모셔져 있다. 보개(寶蓋)를 쓰고 두툼한 코와 입, 늘어진 귓불에 법의를 양 어깨에
걸쳐 흘러내린 통견이며, 굵은 ‘U’자형의 옷자락이 조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상호 등은 대불조성(大佛造成)에 의한 시대적 유형을 살피는 자료로 평가 된다.
나는 망해암을 처음 찾았다. 경내에 들어설 때 포근한 느낌이 전혀 낮 설지 않았다. 답사를 마치
고 돌아서는데 왼지 오랫동안 정든 집을 떠나는 서운함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안양예술공원
방면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전생에 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는가!’하는 생각이 나를 잡는다.
말없이 "無常" 법문을 하고 있다.
'무상이니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
천불전에 모셔진 부처님
용화전에 모셔진 미륵부처님
지장전에 모셔진 지장보살님
스님 생활공간
요사 채 겸 신행공간이다.
얼핏 1층 같으나 반지하가 두 개층이 있어 3층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