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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화성을묘원행(華城乙卯園幸)⓸, 시흥행궁(始興幸宮)에서 화성(수원)행궁으로


 


                                               정조대왕 화성을묘원행(華城乙卯園幸)

                                                             시흥행궁(始興幸宮)에서 화성(수원)행궁으로

  


                             


                                                              정조대왕 영정(원행 때는 무장복장을 즐겼다)


 

시흥행궁의 모습이나 건물배치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시흥환어행렬도가 유일하며, 규모는 1899년도에 작성된 경기도시흥군읍지지도행궁이 114간이다뿐이다.

 

시흥환어행렬도를 참고로 시흥행궁의 면모를 살피면 홍살문 다음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는데 이를 석교라 했으며, 이 지역 옛 노부들은 이 석교가 참 이름다웠다고 기억하였다.



                         

                                                                            시흥행궁 전각 배치도


삼문이 있고, 중문이 있으며, 수행 당상관들의 숙소로 추정되는 전당이 있고, 정조가 머무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전각이 상단 우측에 있으며, 혜경궁 홍씨가 머무른 것으로 볼 수 있는 전각이 상단 좌측에 보인다. 혜경궁 홍씨와 외부인은 공간적으로 격리되어 있으나 정조와는 회랑으로 통하도록 되었다.

 

이번 원행동안 시흥행궁을 담당한 자는 총책으로 정리사 이시수(李時秀, 호조판서)였으며, 낭청에 홍대영(洪大榮, 부사과), 장교 왕도원, 임복기가 임명되었다.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사히 도착하였고 방사(房舍)가 안온함에 만족하여 시흥현령 홍경후(洪景厚)에게 3품직을 제수하고 시흥향청의 우두머리와 수교, 수리에게 상을 내렸다.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 그리고 각 대신들은 행궁이나 객사(客舍)에서 머물렀다 할 것이나, 그 외 많은 수행원과 병사들은 어떻게 숙박하였을까?

29일이면 양력으로 3월 말, 4월 초가 될 때인데 노숙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정리의궤에서는 어가를 가까이에서 수행하는 자들은 행궁 앞 마을 어귀에서 좌우로 나누어 편한 대로 흩어져 숙박하고 그 외 병사들은 마을 어귀 조금 넓은 곳에서 합병하여 진을 이루었다 한다. 현재 898, 899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정조는 시흥행궁에서 편안히 하룻밤을 지내고 윤 210일 아침 일찍이 화성행궁을 향해 출발한다. 대박산전평(大博山前坪, 박뫼산 앞 평야), 염불교(念佛橋), 시흥현과 과천현의 경계인 만안교(萬安橋)를 지나 안양참발소전로(安養站撥所前路)에서 잠시 휴식을 갖고 사근참행궁(肆覲站幸宮)에 도착하여 점심수라를 들고 화성행궁에 도착할 계획이다.

 

시흥행궁 출발예정시간은 묘시(卯時) 이다. 정조는 비가 올 것 같으니 시위군병은 바로 대기하고 있다가 묘정(卯正) 3() 3() 때 모이라.”고 하교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시흥행궁 출발예정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대가자시흥숙소예사근평주정소군령초취인정삼각이취묘초초각삼취묘정삼각

(大駕自始興宿所詣肆覲坪晝停所軍令初吹寅正三刻二吹卯初初刻三吹卯正三刻)

 

조선시대의 시간표시 방법은

23:00

~

01:00

01:00~

03:00

03:00~

05:00

05:00~

07:00

07:00~

09:00

09:00~

11:00

11:00~

13:00

03:00~

15:00

15:00~

17:00

17:00~

19:00

19:00~

21:00

21:00~

23:00

初 正

 

寅 時

卯 時

03:00~04:00

04:00~05:00

05:00~06:00

06:00~07:00

1

2

3

1

2

3

1

2

3

1

2

3

初刻 - 00, 1- 14, 2- 30, 3- 45

 

그러므로 시흥행궁에서 출발준비는 첫 번째 나팔을 04:45에 불고, 두 번째 나팔은 05:00에 불며, 세 번째 나팔은 06:45에 불도록 계획되어있다. 첫 번째 나팔에 기상하고, 두 번째 나팔에 준비하고, 세 번째 나팔에 식사후 집결 완료해야 한다. 정조는 계획표에 의하여 정확히 지시하였다.

 

오전 7시에 시흥행궁을 출발하여 은행나무로에서 시흥대로를 따라 시흥3동 앞뜰[大博山前坪], 염불교(念佛橋), 만안교(萬安橋)를 지나 안양역 앞[安養站撥所前]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갖는다.

 

여기에서 살펴볼 점이 있다.

안양을 어느 길로 갔느냐 하는 점이다. 현재 50m 시흥대로에서 안양역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 원행정례에서는 염불교(念佛橋)를 지나 만안교(萬安橋)에 이르렀다고 한다. 만안교는 지금의 안양교가 확실하다. 염불교는 어디인가?

 

시흥대로 종점(석수역 앞)에서 안양교[만안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하천 둘이 있다. 삼막사 계곡에서 내려오는 삼막천이 있고, 안양아트파크에서 내려오는 삼성천이 있다. 이 하천에 각각 다리가 있다. 경수대로를 따라 가든 만안로를 따라 가든 두 개의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경수대로는 1976년에 개통된 도로이므로 정조대왕이 이용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조는 석수역 앞을 지나 철길을 건너는 안양육교(1980년에 철도청에서 건설) - 안양로 - 만안로 - 염불교 - 안양교[만안교] - 안양역에 도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경부철길은 1905년에 건설되었으며 1980년도에 만들었다는 안양육교는 1905년에 만들 육교를 다시 확장 건설한 것이다. 경부철도가 신설될 때 이 부분은 작은 산맥이 흐르고 있었다. 철길은 이 산맥을 파내고 건설하였으며 그 위에 육교를 만들었다. 1795년도에는 현 경수대로와 높이가 차이 없는 평탄한 지형이었을 것이다.

 

안양육교를 지나 안양로로 내려가는 중간지점인 석수체육공원 입구 건너편에 원태우지사 의거지 표지판이 있다. 원태우(1882~1950)지사는 시흥(안양) 사람으로 19051122일 민족의 원흉으로 안중근의사에 의하여 사살된 이토우 히로부미[이등박문]가 기차로 이곳을 통과할 때 그에게 정의의 돈을 던져 부상을 입힌 분이다. 원태우지사는 길가에서 기차에 돌을 던졌을 것인데 그 길이 지금의 안양로라 할 것이다.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지석

 

이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에는 경수국도가 아닌 안양로와 만안로가 주 도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양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만양로와 갈라지는데 안양로는 후에 만들어진 도로이고 1795년에는 지금의 만안로가 정조가 지나간 도로라 할 것이다.

 

이 만안로를 지나다 보면 삼막천의 다리와 삼성천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원행정례에서는 염불교 하나만을 건넌 것으로 돼 있으며 고지도에서도 다리를 하나만 표기하고 있다. 1872년 제작된 시흥지도에는 안양교, 만안교를 각각 표기하고 있다. 원행정례의 염불교가 안양교로 변경된 듯하다.

 

이와 같이 다리가 하나만 표기된 이유가 무엇일까?

가정을 하면 삼막천은 갈수기에 물이 흐르지 않아 윤2월에는 다리가 없어도 지나가는데 지장이 없으므로 다리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실제 이 무렵에는 수례 등이 통행하기 위해 도랑을 지하로 매설한 은구(隱溝)가 일반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을묘원행을 준비하면서 은구 66곳을 설치했다고 의괘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만안교(지금의 안양교)는 경기관찰사 서용보가 1796년에 완공한 홍예석교이다. 이 다리는 19808월 국도확장 공사로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이전 복원하였다. 지금 안양교는 19878월에 다시 건설한 것이다. 1795년 당시에는 이 안양천이 시흥현과 과천현의 경계선이었다.


                                 

                                                                    이설된 현재의 만안교 모습



                         


                          

                                                   현재의 안양교가 만안교였음을 알리는 지석


이 길을 지나 안양참발소(지금의 안양역 앞)에서 휴식을 갖은 다음 사근참행궁에서 잠심식사를 드시고 수원화성행궁에 들어갔다.

 

이 글은 여기에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애초 정조대왕의 을묘원행 전 노선을 조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흥현 관내에서 어느 길로 이동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 소개한 글에 잘못된 부분이나 미흡한 점이 있다면 바로 잡을 것을 약속드리면서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운 전 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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