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세검정과 옥천암 백불(白佛)의 전설



                               세검정과 옥천암 백불(白佛)의 전설

 

프랑스의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Emile Bourdaret)1902년부터 4년간 조선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남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정진국 옮김)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 중에 옥천암(玉泉庵)에 관한 기사가 있어 여기에 옮긴다.

 

능금골이 백불골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나무로 깎아 지은 정자 한 채가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지었는데 한 복판에 고립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검을 씻은 정자라는 뜻의 세검정(洗劍亭)이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지공방이 있다. 이리저리 쓸데가 많은 질기고 놀라운 조선종이를 만드는 공방이다.

 

다시 하류로 내려가면 삭막하게 틀어박힌 이 계곡에서 마침내 흰부처상[白佛]’을 마나게 된다. 이 백불이 서있는 자리 부근을 두루 덩굴풀골또는 의주로라고 부른다. ‘백불(白佛)’이 더 정확하다. ’해수관음불상(海水觀音佛像)’이라는 뜻인데 전설은 이 불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야 할 만큼 흥미진진하다.

 

원래 큰 바위가 솟아 있었고 그 위에 하얗게 여인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 상은 머리에 작은 탑을 지붕처럼 안전하게 이고 있다. 우선 이 삭막하고 좁은 골짜기에서 그것을 본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 곳에는 암벽을 판 오두막에 기거하는 관리인을 제하고는 매와 수리만이 살고 있다.

 

이 보살 설화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종(조선 13대 임금, 1545~1567 재위) 치세기이다. 당시 김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도성 안에서는 그가 대단한 미남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는데, 그는 둥굴넓적한 얼굴에 작은 마마 자국까지 있고 눈곱이 덕지덕지 붙은 몹시 못생기고도 가난한 처녀와 결혼 하게 되었다.

 

이 청년은 처녀를 가엾이 여겨 이런 불운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이러한 엉뚱한 결혼이 처녀의 잘못이 아닌 중매쟁이의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렇게 추하게 생긴 며느리를 극히 미워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가둬두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아내 편을 들었다. 그녀는 갇힌 채 밤낮으로 일만했고 사정없이 매를 맞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가혹한 생활이 2년간 계속되던 중 가엾은 이 여인은 아들을 가졌다. 그러나 사어머니는 점점 더 무자비해져 서방이 자리를 비운 어느 날 그녀와 아들(손자)을 내 쫓았다.

 

더 이상 순교자 같은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던 이 여인, 해수는 아들(손자)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죽습니다. 당신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개울가에 묻어 주세요. 그리하여 물이 내 몸을 적시면서 미쳐버린 내 혼을 식혀주도록.”

 

이런 소원에 아랑곳하지 않은 김씨(남편)는 관례대로 그녀를 언덕에 묻었다. 하지만 며칠 밤이 지나자 그(김씨)는 자신(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원망하는 혼령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혼령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매장은 관습에 위배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혼령은 현재 유적이 있는 그 자리에 묻어 줄 것을 고집하였다. 김씨는 임금으로부터 아내의 시신을 이장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영혼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가엾은 해수는 이렇게 해서 그 자리에 묻혔고 그 초상은 해수라는 명문과 함께 바위에 새겨졌다.”

 

이 기념비는 민중 신앙을 고취했다. 나는 여자들이 이곳에 와서 결혼과 자식의 행복을 빌며 공물을 바치는 모습을 보았다.

 

다시 전설로 돌아가면,

물이 불어났을 때에도 그것은 절대로 석상까지 차오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힘이 그 물길을 흰 부분 아래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기도 했는데 이는 자명하게 반대되는 현실에도 초자연적인 것을 믿으려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고운(高雲)  전  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