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천(安養川)의 발원지(發源地)를 찾아 걷다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서울의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관악구, 동작구, 양천구, 강서구 등 7개 구의 지역에 직간접으로 걸쳐있다. 한편 경기도는 의왕시, 군포시, 과천시, 시흥시, 안양시, 광명시, 부천시, 등 7개 시가 전부 또는 일부가 안양천 유역에 포함된다.
안양천 유역은 286km²이며, 총 길이(지류 제외)는 32.5km이다.
안양천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안양사(安養寺)에서 비롯된 안양의 지역 명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안양천은 국가에서 관리상 하천 명을 붙이기 이전에는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안양천만이 아니고 한강을 비롯한 전국에서도 그렇게 했다.
안양천 상류지역에서는 사근천(沙斤川), 그 아래에서는 군포천이라 불렀고, 학의천을 인덕원천, 안양에서는 갈천, 동천이라 했으며, 금천에서는 한내·한천·대천(大川) 등으로 불렀다. 또 오목교 부근에서는 오목내, 한강에 연한 양천에서는 철곶포라고 불렀다.
안양천은 크게 9개의 지천을 거느리고 있다. 상류에서부터 왕곡천, 오전천, 당정천, 산본천, 수암천, 학의천, 삼성천, 목감천, 도림천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부르는 이름까지 하면 더욱 많다.
학의천은 청계산과 백운산의 물을 담아 내려오고, 삼성천은 삼막천과 관악산 남쪽지역의 물을 받으며, 도림천은 관악산 물을 받아오고, 수암천과 산본천은 수리산(일명 佛見山)의 물을 담아내고 있다. 목감천은 시흥시 일대의 물을 담아 온다.
안양천은 금천, 구로, 양천 등 평야지대를 흐르면서 자연지형에 맞추어 흐르다 보니 구불구불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에 직각공사를 하여 비교적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었으며, 1974년경에 하상정비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됐다.
이곳은 1973년 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 천엽하는 등 수질이 양호했다. 이후 수질이 갑자기 오염돼서 1979년경에는 악취가 심하여 접근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행히 1994년경부터 하수관 분류 사업을 시행하여 점점 되살아나 오늘은 1970년대 초의 수질을 다시 찾았다.
안양천은 어디에서 발원(發源) 할까?
혹자는 백운산에서 발원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백운산(백운산 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학의천으로 안양천의 지류이다.
안양천의 발원지는 지지대(遲遲臺)이다.
지지대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
정조대왕이 1792년 1월 26일 화성의 현륭원<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후에 장조(壯祖)로 추존>에 참배를 갖다 환궁할 때 수원 북쪽 사근현(沙斤峴, 사근고개)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본래 가슴이 막히는 병이 있어 궁궐을 나올 때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배알하는 예를 마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다소 풀려 가슴 막히는 증세도 조금 가라앉았다. 이 지역은 바로 수원지역의 경계이니 내가 말에서 내려 경들을 불러 보는 것은 행차를 지연시키기 위해서다.”고 하면서 이 고개를 지지대(遲遲臺, 천천히 가는 고개)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 후 이 고개에 ‘遲遲臺’라는 비와 비각을 세우고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다. 그러니 이 고개는 1792년부터 사근고개에서 지지대고개로 바뀌었다.
정조는 평생을 아버지 사도세자(정조 즉위 후 壯獻世子로 고침)를 가슴에 품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살아야 했다. 이 지지대고개를 넘으면 아버님이 계신 화성이 안 보이게 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고 싶은 마음에서 머뭇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인다.
‘지지대’ 비와 비각
나는 정조의 어전에 두 무릎을 꿇고 알현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 한양으로 향했다.
나는 안양천의 발원지와 지류 등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양천 앞 안양천에서 계속 물을 따라 걸어서 지지대고개까지 왔다.
지지대 고개에 떨어진 빗물이 남쪽으로 흐르면 수원천을 이루고, 북쪽으로 구르면 안양천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양천과 정조대왕의 깊은 인연을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안양천 발원지는 일정한 샘이나 저수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지대고개 언덕마루에서 시작한다.
고운(高雲) 전 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