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람의 겉과 속
우리 외교 중국에 당했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초기 민족형성기에는 독립적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중국에 한(漢)이 들어서고부터는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영향을 받는다. 한 때 고구려가 만주 지역을 점유하였을 적에는 중국을 대적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중국과 정책적 대소(大小) 관계를 넘어서지 않았다.
우리가 중국 사람들을 평할 때 ‘떼 놈’‘속 다르고 겉 다른 놈’ ‘엉큼한 놈’등으로 부정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왜 그들을 그렇게 평가 했을까?
사례 두 가지를 들어 보고 오늘의 현실을 짚어 본다.
<사례 1>
18세기후반 정조 때 문체반정(文體反政)을 야기한 장본인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 종형을 따라 북경과 열하를 다녀와서 불후의 걸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다.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봉황산 국경검문소[柵門]를 들어가는 데 중국관원과 우리 사신단을 보좌하는 자들과 시비가 벌어진다.
(연암이 책문(국경검문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시냇가에서 왁자지껄하며 무엇을 다투는 소리가 나는데, 말 소리가 새 지저귀는 듯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급히 가 보니, 득룡이 방금 뭇 되놈(떼놈)들과 더불어 예물(禮物)이 많고 적음을 다투고 있다. 대체 예단(禮單)을 나눠 줄 때면 반드시 전례를 좇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봉황성의 교활한 청인들이 반드시 명목(名目)을 덧붙여서 그 가지 수를 채워주기를 강요한다.
이에 대한 처리의 잘하고 잘못함은 전혀 상판사(上判事)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에 서투른 풋내기라든지, 또는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 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못하고 달라는 그대로 다 줄 수밖에 없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에는 벌써 전례가 되기 때문에 기어코 아귀다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신들은 이 묘리를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만 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하여 그 폐단의 유래가 오랜 것이다.
상삼(象三, 상판사의 마두)이 방금 예단을 나눠 주려 한다.
되놈 백여 명이 삥 둘러섰다. 그 중 한 청인이 갑자기 커다란 소리로 상삼을 욕한다.
득룡이 수염을 쓱 쓰다듬고 눈을 부릅뜬 채 내달아서 그 앙가슴을 움켜잡고 주먹을 휘두르며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뭇 청인을 둘러보고,
“이 뻔뻔스럽고 무례한 놈 보아. 지난해에는 대담하게도 어른의 쥐털 목도리를 훔쳐 가고, 또 그 다음해엔 어른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나의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어른의 칼집에 달린 술[綬]을 끊어가지고 다시 나의 찬 주머니를 훔치려다가 내게 들켜서는 주먹 한 대에 톡톡히 경을 치지 않았나. 그 때는 아주 만단으로 애걸복걸하면서 나더러 목숨을 살려 주신 부모 같은 은인이라 하던 놈이 이번엔 오랜만에 오니까 도리어 어른께서 네 놈의 꼴을 몰라보실 줄 믿고 함부로 떠들고 야단이야.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은 어디 봉성장군에게 끌고 가야지.” 하고 야단한다.
여러 되놈(떼 놈)은 모두 용서해 줄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도 수염이 아름답고 옷을 깨끗이 입은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득룡의 허리를 껴안고,
“형님, 제발 좀 참으시오.”
하고 사정한다. 득룡이 그제야 노여움을 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만일 동생의 안면을 보지 않는다면, 이놈의 콧잔등이를 한 주먹 갈겨서 저 봉황산 밖에 던지고 말 것을.”
하며 으르댄다.
그의 날뛰는 거조는 참으로 우습다. 판사(判事) 조달동(趙達東)이 마침 내 곁에 와 섰기에 아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혼자서만 보기에 아깝더라 하니, 조군이 웃으면서,
“그야말로 살위봉법(殺威棒法)이군요.”한다.
조군이 득룡더러,
“사또께서 이제 곧 책문으로 들어가실 테니, 예단(禮單)을 지체 말고 나눠 주렷다.”
하고 재촉한다. 득룡이 연방,
“예에, 예이”
하며, 짐짓 바쁜 척하고 서둔다. 나는 일부러 그 곳에 머물러 서서 그 나눠주는 물건의 명목(名目)을 상세히 보았다. 매우 괴잡(怪雜)스러운 일들이다.』
우리 사신단이 중국국경을 통과할 때면 으레 예물을 주는데 이를 터무니없이 많이 요구하는 중국관인들의 속성을 꾀 뚫고 있는 득룡이 선수를 처 중국인들의 기를 제압하는 과경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가지를 쓰고 그것이 관행이 되어 매년 많은 예물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사례 2>
다음은 국내의 모 일간지 기자가 중국에서 초년에 겪은 이야기다.
『모 기자는 중국을 여행 중 작은 음식점에 들렀다. 마침 그 지방의 특산물인 물고기 튀김이 있어 한 접시에 얼마냐고 물으니 40엔이라고 한다. 물고기 한 접시와 술을 주문했다. 다 먹고 나서 계산을 하는데 물고기 한 접시 값이 70엔이라고 한다.
“아니, 무슨 소립니까? 주문할 때 40엔이라고 했잖소?”하고 확인을 하니,
이 점포주 대답이
“손님이 주문할 때 물고기와 드신 물고기는 다릅니다. 그래서 70엔을 내야 합니다.”한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싶어 따지는 사이에 주변에서 중국인이 삽시간에 100여 명이 운집하였다.
모 기자는 낮 설은 곳에서 위압감을 느껴 경찰을 불렀다. 출동한 경찰이 부당한 주장을 하는 점포주를 혼내고 자기편을 들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경찰은 뜻밖의 말을 한다.
“둘이 잘 협상하십시오.”
그게 무슨 경찰이 할 소리냐고 항의를 하니 경찰은
“당신이 중국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는데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당신은 70엔짜리 고기를 먹었으니 그 값을 치르던지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꾸미던지 아니면 타협하라.”는 것이다.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작성해도 결과는 나아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결국 그 기자는 55엔을 지불하고 그 공포의 도가니, 가증스런 점포주의 니끼한 표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은 결과를 가지고 따지며 과정은 무시한다.”면서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이 더 나쁘다."고 한다. 그것이 중국인들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정부와 중국이 화회(和會)관계에 접어들었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이번 외교통산부 장관이 문대통령과 시진핑과의 정상회담을 상의하기 위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중국은 사전에 약속한 3불(3不)을 지키라고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장관은 한 마디도 못했다고 전한다.
왜?
강장관, 자기가 먼저 섣부르게 공공연히 발표를 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문대통령도 지난번에 한중정상회담에서 싸드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의 태도는 다르다. 이러한 결과는 현 정부가 중국을 모르고 접근한 외교적 실수다. 적을 알고 협상을 해야지 모르고 합부로 덤비면 언제라도 이러한 참패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정부의 대북협상도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고운(高雲) 전 만 수